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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일기

가짜노동 : 직장에서의 공허에 이름 붙이기

by 오늘의이약이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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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인잡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언급했던 책 #가짜노동
책 제목만으로도 눈길이 확 가는 네이밍의 이 책을 사게 된건 어쩌면 이 "가짜노동"이라는 단어가 내가 직장에서 느끼는 공허함에 대한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 떄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무의미한 문서를 찍어내고, 같은 내용으로 대여섯가지의 결제서류를 만들어내는 일에 의문과 자괴감을 가지면서도 이 불편함에 어떤 명확한 실체를 깨닫지는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가짜노동이 많이 섞여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시간으로 계산된 임금을 받는다. 거대하고 복잡해지고 분업화된 현대사회 일의 형태는 한 사람이 하는 일의 가치를 명확히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은 어쩌면 효율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직장인에게 유리한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으로 대가를 지불받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떼우기 위한 가짜노동을 불러온다. 같은 시간동안 일을 많이하던, 적게하던 같은 임금을 받는다면 아무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같은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낸다면 (그리고 그것을 티낸다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직장인의 현실이다. 일의 성과가 명확하고, 그것이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직업이라면 모를까,(그런 직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지않다면 직장상사들은 일을 빨리 끝내고 잘 해내는 직원에서 칭찬과 대가와 휴식시간을 지불하기는 커녕 더 많은 일을 준다. (직원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제공한 일의 양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단순히 부하직원에게 일을 줘야하는 위치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아무 보람이 없고, 오히려 더 많은 일만 하게 된다면 일을 열심히 할 동기부여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아무도 몰래 같은 일을 질질 끌면서 적게 일하는 가짜노동을 하면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책에 나와있듯이 사람은 본인 스스로의 인정욕구를 필요로 하고, 가짜노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번아웃'의 반댓말인 '보어아웃'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발전을 하고 싶어한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아무것도 배우지도, 무언가를 생산해내지도, 의미있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행복할 사람은 없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느껴서 더 이 일을 잘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유의미한 일을 포장하고 있는 무의미한 절차와 규정과 규제를 위해 나의 시간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그만큼 애정을 쏟기 어려워진다.
 
아쉬운 점은 이 책에 나오는 해결책을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한낱 직장인에 불과한 개인이 스스로 나는 가짜노동을 하고 있다고, 일이 끝났으니 일찍 가보겠다고, 무의미한 회의와 절차를 없애자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이런 파격적인 변화는 회장님 아들이나 되어야 가능할듯) 우리나라도 점점 무의미한 야근과 회식 문화가 사라지고, 주당 근무시간이 줄고 있다는 점에서 느리지만 어쩌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대위 노동을 하지 않는 사무직, 관리직의 증가와 이들 직종이 요구하는 높은 학위 등은 우리나라도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전에는 고졸 학력이나 아카데미 등의 기술 교육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많은 직업들을 현재는 대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거나 대학에 학과를 만들어서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쓰게 만든다.(세상에는 참 중요해보이지만 무의미한 일들이 많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고, 공유할수록 더욱 의미가 높아지는 책인 것 같다. '나는 가짜노동을 한다'는 말은 '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고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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